[정재+누아] 회색역을 표류하는 자들
- 회색도시2 시점 이후, 날조와 설정 짜집기가 다분합니다.
- 약간의 유혈 묘사가 있습니다.
정은창은 몸을 비틀다 벌떡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일으킨 몸에 낡은 침대가 괴음을 냈다. 적막한 방 안에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가슴을 쥔 손이 가쁘게 오르내렸다.
“.......”
찬 피부를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더듬었다. 움푹한 양 뺨에 미끈한 체액이 묻어났다. 정은창은 어둠 속에서 익숙한 실루엣을 더듬어 갔다. 침대 옆에 놓인 쓰레기 봉지 두어 개와 머리맡 재떨이의 흐릿한 윤곽이 비쳤다. 시퍼런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수많은 시선도, 사지를 잡아 붙들던 손도,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그는 이불 끝자락을 잡아당겨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아내었다. 가쁜 숨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그는 얼굴을 시트에 묻은 채 주문처럼 되뇌었다. 꿈은 꿈일 뿐이다. 그것도 지독한 악몽.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밤새 뒤척여 헝클어진 이불에는 붉은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문쪽을 바라보았다. 커튼이 채 막지 못한 빛이 가늘게 새어 들어왔다.
새벽의 노을빛이었다.
영면을 이루지 못한 하루가 또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커텐을 젖혀 내었다. 문을 열고 베란다에 발을 내디뎠다. 맨발에 닿아오는 타일이 스산했다.
뺨을 스치는 바람에 고개를 들자, 펼쳐지는 회색 풍경 뒤로 떠오르는 해가 있었다. 몸을 한껏 움츠린 그는 먼 눈으로 눈앞의 풍경을 응시했다. 난간 너머에 우글우글 자리 잡은 회색 빌딩들은 음울한 기운을 자아냈다.
밤새 골통을 할퀴는 고통이 엄습해 올 때면 새벽의 도시를 바라보고는 했다. 땀으로 눅진하게 젖은 옷으로 스며드는 차가운 공기. 떠오르는 햇빛에 비정할 만큼 붉게 물든 빌딩들. 그것들은 수많은 변곡점을 찍어온 삶에서 불변이라는 기묘한 안정감을 가져다주곤 했다.
세상 모든 비극과 절망이 자신을 축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세간은 잔인할 정도로 무관심하다. 죽은 밤은 깨어나고, 해는 다시금 진다. 하늘은 붉고 검게 물든다. 별은 떠오르고 추락하길 반복한다.
그 속에서 도시는 고요히 순환한다.
그 정도 비극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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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 부는 쌀쌀한 바람이 매서웠다. 철썩, 쏴아아, 하고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 부둣가 변을 따라 죽은 듯 점멸하는 붉은빛들. 어둠이 내린 항만은 이따금씩 치는 파도 소리만 빼면 기척 없이 고요했다. 남자는 해변가를 따라 거대하게 쌓인 방파제를 스쳐 지나갔다. 양 뺨에 치대는 바닷바람이 시린 지 코트 깃을 꽉 여문 모양새였다.
"하아.... 젠장. 얼어 죽겠네."
쓰으읍, 후우. 남자는 몸을 떨며 걸음을 부러 잘게 걸었다. 그는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다 습관적으로 담배 한 개비를 물었다. 곧 뿌연 김이 검은 코트자락 뒤로 흩어졌다.
남자는 반시간 전에 받은 전화를 떠올렸다. 전화 너머 목소리는 한시가 급한 용건이라며 닦달하는 통에 부리나케 달려오는 길이었다. 말이 파트너지 사람 불러다가 시다바리 시키는 꼴은 영감이 붙인 하수인을 다루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기분이 영 마뜩잖아진 남자는 간신히 불붙은 담배를 힘주어 빨아들였다. 어지러웠던 정신을 가라앉힌 듯, 그의 걸음은 망설임 없이 폐창고로 향했다.
*
문짝의 째지는 경첩 소리와 함께 쇠파이프가 댕그랑,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폐창고 안쪽에서 날아온 것이었다. 남자는 재빠르게 나이프를 빼들었다.
"이제 왔냐? 생각보다 늦었네."
태연하게 손을 흔드는 익숙한 낯짝에 남자는 하릴없이 입김을 내쉬었다. 나이프를 접고 담배를 껐다. 어둠 속에 떠올라 있던 붉은 점이 사라졌다.
"... 주정재."
“야, 이 자식아. 내가 너무 의욕넘치게만 굴지 말라고 했지? 손님 오시는데 쇠파이프를 날려?”
폐창고 안쪽에서 투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어둠에 적응된 눈이 점차 시야를 넓혀갔다.
눈에 익은 낯 주변으로는 전부 처음 보는 얼굴들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어림잡아 대여섯 명 정도 되어 보이는 인원이었다. 그의 시선은 덩치들 사이로 유일하게 움직이고 있는 그림자로 향했다. 그림자의 주인은 남자의 발치까지 굴러들어간 쇠파이프를 보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쫄았어? 어서 들어와, 날 춥다. 다 영감 쫄다구들이니까 안심하라고."
남자는 빼들었던 나이프를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거의 나가떨어진 문짝을 끼워 닫고 폐창구 안으로 발을 들였다. 내딛는 걸음에 무언가가 걸렸다. 쇠파이프였다. 발을 굴려 파이프를 밀자 낡은 우레탄 바닥이 끼익, 하는 마찰음을 냈다.
문밖에서 새어드는 전등 빛에 구부러진 쇳덩이가 빛났다. 마모된 끝은 핏자국이 흥건했다.
"뭐해? 가서 들고 와."
주정재가 지시가 떨어지자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던 그림자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남자는 허리를 숙여 파이프를 주워 올렸다. 아직까지 피 묻은 면이 번들거리는 걸로 보아 흉기로 쓰인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남자는 파이프를 검은 실루엣의 상대에게 건네었다. 상대는 머리를 꾸벅 숙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쇳덩이를 손에 쥔 채 돌아가는 뒷모습은 어딘가 왜소한 데가 있었다. 남자는 그의 덥수룩하게 내려온 머리칼 사이로 언듯 비친 얼굴을 떠올렸다.
많이 쳐 줘야 20대 초중반이나 될 법 한 앳된 청년이었다.
"... 지금 이게 뭐 하는 건데?"
"어어? 뭐야, 새벽에 먼길 뛰어오게 해서 화났어? 일단 여기 앉아 봐. 자초지종은 일 처리하고 나서 듣자고."
주정재는 의자 옆에 놓인 나무 상자를 손바닥으로 탁탁 두들겼다. 그 옆으로 바닥을 굴러다니는 시멘트 포대와 드럼통이 보였다. 남자는 가는 눈으로 주정재 옆에 둘러싸인 자들의 모습을 좇았다.
그리고, 순간 남자는 창고 안으로 내딛던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고약한 피비린내가 밀폐된 공간의 하취와 섞여 코끝을 강하게 찔렀다. 빠르게 시선을 옮겨 앞을 보았다. 희미하지만 무언가가 퍼덕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주정재의 발치에 성인 남성 하나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포대가 꿈틀댔다. 남자는 그제야 피 묻은 쇠파이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다.
"뭘 그렇게 눈을 굴려. 없던 의심병이 도지기라도 한 거야? 일 거의 다 끝났어. 슬슬 피날레야."
"... 일 거의 다 끝났으면 사람을 왜 불러?"
"더럽게 비싸게 구네. 돌아가는 길에 이 형님이 통 크~게 쏠 테니까, 그걸로 퉁 치자. 오케이?"
읏차, 주정재는 바지에 묻은 먼지를 대강 털어낸 후 양옆의 청년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청년들은 내려두었던 흉기를 손에 감아쥐고 한발 앞으로 나섰다.
"자, 슬슬 정리하자고. 너희들도 여기서 날밤 새고 싶지는 않잖아. 그치? 빨리하고 집에 돌아가자!"
얼마 간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만이 적막한 폐창고 안을 울렸다. 남자는 거칠어지는 숨을 골랐다. 굳은 혀를 움직여 마른 입안을 축였다. 땀이 찬 손이 피라도 묻은 것처럼 끈적거려왔다. 목각의 둔음을 마지막으로 비명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엎어진 포대 자루에서 핏물이 스며 나오며 바닥을 적셨다. 지독한 비린내가 흘렀다. 남자는 착잡한 눈으로 드럼통에 구겨 넣어지는 포대를 주시했다. 청년들은 좁은 드럼통의 입구에 들어맞지 않는 포대 주머니를 억지로 두들겨 욱여넣고 있었다. 멀찍이 지켜보기만 하는데도 절로 목구멍에 신물이 차올랐다.
주정재는 멀거니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 쯧, 하고 혀를 찼다. 고개를 들자 열 걸음쯤 되는 거리에서 발길을 멈춘 남자가 보였다. 주정재는 남자가 애써 그려낸 덤덤한 표정을 살피다 씩 웃어 보였다.
“왜, 너도 손맛 한번 좀 보고 싶어?"
"... 난 됐어."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거든? 나중에 후회해도 늦는다?"
주정재는 뭐가 좋은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주변에 굴러다니던 빈 드럼통을 발로 차 넘겼다. 데굴데굴 굴러가던 드럼통은 포대 앞 자루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사실 네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어. 괜히 부른 거 아냐. 설마 이 엄동설한에 아무 일없이 불러냈을까 봐?"
"......."
"저거, 해뜨기 전에 크레인 끌어다가 앞바다에 던져 놔야 돼."
혼자만 손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심산이다. 적어도 남자에게는 주정재의 말이 그렇게 들려왔다. 낮에는 시민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고, 밤에는 경찰 간부의 명령을 받아 뒷골목의 피를 닦아나간다. 스스로의 정체를 숨기고 회색이 되기를 자처한 남자와 별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그는 힐끔 주정재를 쳐다보았다. 주정재는 무슨 일이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남자는 애써 고갤 저었다.
남자를 대하는 주정재의 태도는 언젠가부터 날이 죽어 있었다. 과거엔 묘한 질투가 어린 시선을 보낸적도 있던 그였다. 비슷한 처지에 어딘가 동질감이라도 느끼는 건가. 남자는 토막 같은 한숨을 내뱉었다. 청년들이 바닥에 시멘트를 개고 있었다.
경찰 고위 간부의 은밀한 심복. 본모습을 감춘 채 흑과 백의 경계를 밟고 서 있는 남자. 그 회색역을 표류하는 이들에겐 하나 다른 점이 있었다. 남자는 회색에 녹아들어 간 삶을 영위해 갔다. 하지만 주정재는 백과 흑의 경계를 넘어드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동료의 딸을 손수 거두고, 기업과 경찰의 그늘 밑에서 살인을 저질렀다. 그를 단순히 위선자偽善者라 일컫기에는 부족했다. 애초에 그는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 꾸며낼 선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옛날 생각 나네....”
주정재가 덧없이 중얼거렸다. 아무도 믿지 않고, 아무도 진심으로 따르지 않는다. 신념은 무가치하다. 다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만을 따른다. 그것이 지금 이 주정재라는 남자를 만들어 낸 것이리라. 시멘트로 꿀럭꿀럭 차오르는 드럼통을 바라보던 주정재가 돌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는 손끝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느끼고 주머니 속에 손을 숨겼다. 차가운 날의 감촉이 손끝에 감겨 왔다. 접힌 날을 힘주어 부러 쥐었다.
"눈물 없이는 못 봐줄 꼴이네, 아주. 요지경 세상이야.”
"......."
“속 안 좋냐? 얼굴이 창백하네.”
“별로.”
“영감 배신하면 우리도 이 꼴 나는 거야. 이 바닥에선 정신 똑바로 차려야 돼.”
주정재가 웃음기 띈 얼굴로 남자에게 말했다. 남자를 흘겨보는 그의 눈빛이 묘하게 빛났다.
"궁금하지 않아? 저게 누군지, 누가 이런 일을 시켰는지."
"... 아니."
"싫음 됐다, 말어라. 하긴, 그 편이 명 길게 뽑을 순 있겠지."
주정재는 탄식 같은 한숨을 뱉었다. 남자는 대답 없이 시선을 피했다. 얼마 간 둘 사이에선 침묵이 흘렀다.
사실 남자에게 전혀 짚이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다. 주정재와 동행하지 않는 시간에 그 나름의 탐색을 거듭한 결과였다. 백석 그룹. 최근 그들은 중소기업에게 압력을 넣어 해외에도 생산설비를 확충하고 있었다. 지금은 영광된 이름을 누리는 거대한 사업체이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그 뒷배를 단단히 받치고 있는 세력 가운데엔 폭력 조직들이 섞여 있었다는 소문이 세간에 왕왕 돌았다.
하지만 국가의 대대적인 소탕 작업으로 조직폭력의 주축을 이루던 선진화파가 무너진 후, 경찰은 그들의 완전 박멸을 선언했다. 조직의 이름 있는 이들과 그 측근들은 줄줄이 철창신세를 지냈지만 나머지 잔당들의 소식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었다.
김성식의 최후에 손을 쓴 건 누구였는가. 요동치는 기억을 더듬어 추려낸 결론은 어설펐지만 그냥 넘기기에는 석연찮은 점이 있었다. 두 팔을 붙들린 조직의 두목에게 달려가 칼을 꽂아 넣는 뒷모습은 어딘가 엉성했다. 실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 체구의 청년, 아니, 소년인가. 범인인 그가 내지르는 칼에는 감정이 실려있지 않았다. 남자가 휘둘러왔던 것과는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마치, 그렇게 행하도록 만들어진 기계 부품처럼....
"......."
남자는 주정재를 가로질러 자신이 옮겨야 할 드럼통 앞에 멈추어 섰다. 불룩한 통 안을 빼곡히 채워 든 회색질의 시멘트가 보였다. 이제 막 해외진출의 신화를 써 내려가는 백석에게 과거의 조력자란 지워내야 할 오점에 불과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뒷말을 덮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남자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과거에 마주쳤을지도 모르는 상대를 향해 짧은 동정과 추모를 올렸다.
어느새 남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모습을 주정재는 말없이 지켜보았다.
선박에서 맞는 소금 내 섞인 바람이 복잡한 상념을 치대었다. 붉고 파란 컨테이너 박스들이 쌓인 선박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요람 같았다. 초연히 버티고 있는 우람한 선박들은 어딘가 경건한 분위기마저 풍겼다.
공포와 폭력으로 얻어낸 충성은 알량하기 그지없다. 인질극 사건 이후로 조직 본부에서 몸을 내뺀 이들은 모두 흩어 사라졌다. 두목을 잃으면 제 살길 찾아가기 바쁜 한낱 졸개들의 무리일 뿐이다. 다들 어딘가에 꽁쳐 둔 목돈이나 주섬주섬 긁어모아 지방으로 내뺐을 것이라는 게 일반 사람들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지금 남자는 그들을 자신의 손으로 묻어가고 있었다. 철썩이는 파도 속으로 드럼통이 하나둘씩 내리 꽂혔다. 부글부글 기포를 내뿜던 드럼통은 저 깊은 해면으로 침몰해 갔다. 그들은 이제부터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다.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또한 찾지 못한다. 그대로 이 땅에서 소멸되는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남자는 그 사실에 묘한 현기증을 느꼈다.
"이 지긋지긋한 일이 끝나도... 해는 뜨는구만."
주정재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지평선 너머로 떠오르기 시작한 붉은 해가 보였다. 시커맸던 바닷물이 점차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수면에 비치는 밝은 햇빛에 눈이 시렸다. 더는 바라볼 수 없는 빛이었다.
남자는 햇빛을 등진 채 항구의 부둣가로 걸음을 옮겼다.
*
“그건 좀 괜찮냐?”
“뭐가?”
“얼굴 말야. 치료는 받은 거야?”
“칼빵 맞은 게 뭐 한두 번도 아니고. 낯짝 좀 찍힌 게 별 대수라고.”
“인마, 아무리 그래도 면상은 중요한 거 몰라? 우리가 하는 것도 다 일종의 비즈니스라고, 비즈니스! 고객님들한테 잘 보여야지!”
“전국의 비즈니스맨들이 다 얼어 죽었나. 또 뭔 헛소리야?”
“면상부터 범죄자 상인 놈이랑 뭘 하려고는 하겠어? 딱 봐도 쇠고랑 찰 관상이잖아.”
주거니 받거니 기울인 잔이 늘어 포차 한구석에 쌓여 갔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주정재의 계속된 권유에 못 이겨 작은 포차집을 들렸다. 핏값을 내겠다며 고깃집에 끌고 가려는 걸 만류하고 비교적 빠를 것 같은 포장마차를 고른 것이었다. 이런 날에 혼자 자작하게 두면 사람새끼도 아니라며 넋두리를 늘어놓던 그는 주문한 어묵탕이 나오기도 전에 병나발을 불었다.
“그 얼굴로 주택가 어슬렁거리는 짓도 좀 그만두고!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 그게 뒤 밟은 놈이 할 소리냐? 아주 스토커 새끼가 따로 없네.”
“이것 봐라? 이젠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거지? 순경 안 만나게 조심해. 잡혀 들어가기라도 하면 나, 너 가드 못 해준다?”
“짭새 새끼가 짭새 걱정 하기는.... 민중의 지팡이라는 분들이 동료 의식은 쥐뿔도 없나 봐?”
“푸하하! 없지, 그딴 거....”
어딘가 허탈한 듯한 웃음을 터뜨리던 주정재는 빈 잔을 다시 들었다. 식어빠진 빈 안주 그릇을 앞에 두고 부어라 마셔라 입에 털어 넣는 폼새가 영 볼썽사나웠다. 남자는 잔이 넘치는 줄도 모르고 소주병을 기울이는 주정재를 쳐다보았다.
"자작하기 싫다고 해서 데리고 온 거 아니었어?"
"몰라. 젠장, 빌어 처먹을.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뭔 개팔자가 끼어서는.... "
그는 벌겋게 뜬 얼굴로 혀 꼬인 소리를 냈다. 쾅하고 내려둔 잔에 빈약한 철제 테이블이 덜그럭거렸다. 평소보다 언사와 행동이 거칠다. 자신이 모르는 무슨 일이 있던 게 분명했다. 가뜩이나 마뜩잖은 그의 심기를 누군가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가 입에 올리는 회장 아니면 영감 짓이겠지. 남자는 포장마차의 투명한 비닐에 비치는 바깥을 내다보았다. 이른 새벽을 맞은 상가들의 간판이 하나둘씩 켜져 갔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뱉었다.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셔가는 통에 적어도 두 시간은 족히 더 붙들려 있을 것 같았다.
“... 뭔 일 있었는지 물어보지도 않냐? 하여간 정 없는 새끼.”
"미안하다, 이런 놈이라서."
"그러고 보면 넌 참 니 얘길 안 하더라?"
주정재는 새로 깐 소주병을 들어 남자에게 손짓했다. 남자는 마지못해 잔을 들어 내밀었다. 휘청거리는 손짓에 잔이 넘치도록 차올랐다.
"... 피차 남인 거. 사정 같은 거 알면 머리 아프잖아."
"뭐?"
남자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흠칫하고 정신을 차렸다. 포차의 안락한 기운 탓인가, 생각 없이 튀어나오는 말들에 머리가 바짝 섰다. 남자는 주정재의 황당한 시선을 피하며 잔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탁 하고 잔을 내려놓은 뒤 입가에 남은 술을 손으로 훔쳤다.
"암튼 그렇다고. 서로 골 안 아프고, 좋은 거 아냐?"
“허이고. 찬바람이 쌩쌩 부네. 아주 입 돌아가서 얼어 죽으시겠어.”
“거 좋네.”
"있잖아, 뱉으면 뱉는 대로 다 말이 되는 건 아니거든?"
주정재는 부러 나긋나긋한 어조로 음절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남자가 반응 없이 담담한 얼굴로 소주병을 향해 손짓하자 주정재는 어이없다는 듯이 허,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는 소주병을 들어 남자의 앞에 쾅하고 내려두었다.
“하! 알겠다, 알겠어. 너님 다 처먹으세요. 이런 화상이랑 술 빨려 한 내가 등신이지, 등신이야. 아오.”
"집 가는 사람한테 먼저 치근덕댄 게 누군데 그래?"
"... 내가 너 같은 새끼랑 얘기하느니 벽이랑 대작을 하고 말지."
술맛 떨어지게. 주정재는 씨근대며 냄비에 붙은 안주를 싹싹 긁어 그릇에 그득 담아 넣었다. 그가 그릇을 다 비워갈 때까지 남자는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세상에 우연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건과 발생은 촘촘하게 짜인 인과에 기인한다. 힘없는 약자들은 비극이란 무대에서 인과의 연쇄를 연기하는 배우가 된다. 허나 각본을 들고 있는 자는 끝끝내 무대에 모습을 비추지 않는다.
상하이와 광저우의 분지 좋은 땅들은 모두 중국 졸부들의 소유였다. 며칠간 안면까지 터 버린 거래 상대는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중국 시골 토박이였다. 그 때문인지 중간에 일어난 몇 번의 칼부림도 감내해야 했다. 한 번은 치고받는 통에 물건을 빼돌리려다 머리를 틀어 묶은 칼잡이에게 얼굴을 긁혔다. 빼돌린 물건으로 당국 경찰에게 뒷돈을 쥐여주자 암암리에 행동하는 것을 눈감아 주었다.
그제야 주정재가 영감이 그의 파트너로 뒷골목 경험이 있는 자를 원했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아직도 정계와 돈, 조직이 끈끈하게 얽힌 그들을 회유하려면 해묵은 방식을 써야 한다는 말이었다.
“카메라 세팅해놓은 놈이 사각지대도 더 잘 아는 법이지.”
칼자국 난 흔적에 락스 통을 들이붓던 주정재 경사는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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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내리던 겨울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남자는 긴장 섞인 숨을 들이쉬었다. 가느다랗고 삐죽한 날이 손안에 감겼다. 그는 주머니 안에서 접이식 나이프를 오므렸다 펴 보았다. 오랜 쓰임으로 뻑뻑해진 접합부가 도리어 제 용도를 할 듯했다. 끼걱끼걱. 녹슨 날을 손끝으로 긁어내던 그는 입술을 베어 물었다. 옅은 한숨을 내쉬며 날붙이를 접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지천이 온통 어두컴컴했다. 시커먼 구름에 뒤덮인 하늘은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비를 쏟아냈다. 얼은 비가 흙바닥에 둔탁한 궤적을 남겼다. 눈이라도 오면 운치 정돈 좋으련만. 남자는 하수구 쪽으로 불 꺼진 꽁초를 휙 던지곤 코트 깃에 목을 파묻었다. 한겨울의 찬 바람이 코트의 빈 곳을 파고들었다.
습기 먹은 공기를 들이쉬자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비가 내릴 때마다 시큰거리는 가슴 한 켠은 긴 시간에도 무뎌지지 않았다.
'오빠, 무사히 돌아오는 거죠?'
'혜연이.... 부탁해.'
남자는 귓가에 메아리치는 맑은 목소리들을 조용히 되뇌었다. 그에게 비가 오는 날은 많은 것들을 연상시켰다. 판잣집의 축축한 잔해를 파헤치던 두 손. 은인을 구하려 하릴없이 내딛던 젖은 발자국들. 작은 희망은 간사하다. 몸집이 작아 품기 쉽고 그만큼 깨어지기도 쉽다. 바스러진 희망은 형체를 남기지 않는다. 어둠이 내린 산에서 산산조각 난 은서의 몸을 젖은 흙으로 덮었다. 총상을 입은 권현석의 시신을 폐허에 내버려 둔 채 뛰쳐나왔다. 빗물은 그가 두 손을 오므려 어렵사리 퍼올린 기원과 믿음을 모두 차갑게 흘려보냈다. 수많은 이들의 생을 앗아 왔음에도 양지의 삶을 바랐다. 자격 없는 희망을 빌었기에 이토록 괴로운 것이다....
"이젠 다 컸네, 다 컸어. 어휴. 누가 보면 마누라한테 전화 걸려온 줄 알겠네."
"누구 말이야?"
어젯밤 포장마차서 술을 기울이던 주정재는 걸려 온 연락에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십 분이 지나서야 술기운에 비틀거리며 돌아왔다.
"우리 집 딸내미 격 되시는 분이지. 전 팀장님 피붙이야."
"... 전 팀장님?"
"그래. 그 녀석, 자기 딸한테는 그렇게 끔찍했었는데....."
남자는 어딘가 가슴 시린 듯이 전화기를 내려다보던 주정재를 떠올렸다. 평소 그가 권혜연의 이야기를 입밖에 내뱉은 적은 없었다. 습관처럼 주택가를 맴도는 남자를 보고 박쥐 새끼라며 불같이 화를 내던 주정재였다. 분명 술기운 탓이었겠지. 아니면 며칠 후에 다가오는 권현석의 기일을 신경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남자는 주정재가 매 기일마다 권혜연을 데리고 권현석의 묘를 찾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주택가에 들어서자 가로등이 노랗게 빛났다. 전봇대마다 얼기설기 엉킨 전화줄이 구름 낀 하늘 밑을 수놓았다. 타닥타닥, 우산 머리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남자는 우산을 접어 넣고 골목 안쪽의 처마로 몸을 피했다. 철제 셔터가 내려진 상가건물 옆에 숨을만한 전봇대와 벽이 있었다. 남자는 손에 들린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발로 뭉개었다. 여기서 목조 지붕이 붙은 집을 넘어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권혜연의 집이 나온다. 권현석이 살아있었을 적 몇 번 밤을 묵은 곳이기도 했다.
남자는 주머니에 들린 물건을 더듬었다. 플라스틱 라이터와 뚜껑이 너덜 해진 담뱃갑, 비닐 채 뜯지 않은 새 돛대 한 갑, 무언가 일지 모를 비닐 쓰레기, 그리고. 그는 벽돌벽에 등을 기댄 채 나이프 한 자루를 다시 매만져 보았다. 흐린 빛이 날 끝에 맞아 여리게 빛났다. 손잡이는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삭은 날은 주황빛을 띄고 있었다. 날 끝에 손톱으로 긁힌 자국이 선명했다. 이 날처럼 자신의 마음도 무뎌져 삭아버리고 만 걸까 생각했다. 갈리고 녹슬어 더는 움직임을 멈춘 톱니처럼. 비 오는 날 먹먹해지던 가슴은 그저 무겁게 들이쉰 습기 때문이었나. 파트너가 세상을 얻은 듯이 호탕하게 웃어 보일 때마다 주머니 속 칼을 쥐었던 건, 그저 못된 습관의 일부였나. 남자는 그 무엇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앗뜨뜨... 우와, 이거 진짜 뜨겁네요. 아저씨, 아저씨도 이거 한쪽 드세요!"
남자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차가 빼곡히 주차된 골목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어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남자는 전봇대 뒤로 더욱 바싹 숨었다. 비스듬히 내뺀 얼굴에 전봇대와 벽 틈으로 골목길이 내다보였다.
"혜연아, 아저씨 아까 이거 하나 먹고 입 다 데인 거 몰라? 아야야, 아직도 혀가 다 쓰리네."
"그야, 이 뜨거운 걸 한입에 다 넣으려고 하셨으니까 그렇죠!"
자, 이거 보세요. 이쪽 꼬리는 팥이 텅 비었잖아요? 이런 꼬리부터 조금씩 먹으면 안 뜨거워요. 권혜연은 반으로 자른 붕어빵을 후후 불고는 주정재에게 건네었다.
"아이고, 나는 혜연이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불러요! 식기 전에, 얼른 먹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은 남자가 서 있는 골목 앞을 지나쳐갔다. 학교에서 늦게까지 공부하고 돌아온 듯 아직 교복 차림인 권혜연과 우산을 씌워주고 있는 주정재의 모습이 보였다.
"안 되겠다. 저희 빨리 가서 약 발라요."
"어엉? 입안에도 약을 발러?”
“그럼요! 아빠가 이런 건 제때제때 발라줘야 금방 낫는댔어요.”
권혜연은 주정재의 팔을 끌어당기며 재촉했다. 주정재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권혜연의 뒤를 부리나케 따라갔다.
“혜연아! 비 맞으면 감기 걸린다!”
“괜찮아요! 여기 바로 앞인걸요, 뭘.”
권혜연의 웃는 소리와 찰박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이내 골목은 다시 빗소리에 잠겼다. 남자는 속이 턱 막혀오는 기분에 가슴을 손으로 쥐었다. 절로 숨이 가빠 왔다. 종이가방을 한 아름 품에 안은 채 환하게 웃던 권혜연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드럼통에 쏟아지는 시멘트를 보고 웃음을 터뜨리던 주정재의 얼굴이 뒤이어 떠올랐다. 날을 쥔 반대쪽 손이 부르르 떨렸다. 힘주어 문 입술에서 비린 향이 났다.
“.......”
남자는 떨리는 손을 들어 담배 한 개비를 손에 쥐었다. 눅눅한 끝에 겨우 불을 붙였다. 그녀는 주정재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른다. 간밤에 수많은 이들을 해치고 묻은 것도, 폐허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어떻게 죽어갔는지조차도. 퉁퉁 부은 얼굴로 아버지의 묘 앞을 지키던 모습이 생경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도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했다. 그저 그림자에 녹아들어 곁을 맴도는 것이 그녀를 지키는 일이라 생각했다. 주정재는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 그제밤 술기운에 슬쩍 흘린 말을 보고 확신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에게 손을 뻗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는 권현석의 집에서 밤을 지냈을 적을 기억해냈다. 이미 먼 기억 속에 잊힌 가족의 온기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던 나날들. 남자에게 그 시간들은 더없이 소중했다. 그럼에 더 또렷이 기억할 수 있었다. 농담 섞인 따뜻한 말들을 주고받으며, 권현석에게 환히 웃어 보이던 권혜연의 얼굴. 아버지를 걱정하며 그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건넨 그녀.
남자는 손에 쥔 칼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바닥이 꺼져 드는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주정재를 대하던 권혜연의 표정을 떠올렸다. 입안이 데었다는 말에 그녀의 얼굴에 스친 걱정스러운 낯빛은, 과거에 홀로 외로운 싸움을 계속했던 권현석을 바라보던 표정과 닮아 있었다.
큰 상실을 겪은 마음은 누구보다도 잘 안다. 상실은 어떤 것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약하게 만든다. 누구에게나 기대고 싶게 하고, 텅 빈 마음을 메우려 무엇이든 갈구하게 만든다. 권혜연에게 가족은 권현석 한 명뿐이었다. 그 빈자리는 더욱 컸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존재를 채워 준 것은 다름 아닌 주정재였다.
남자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다 태운 담뱃재가 발치로 떨어졌다. 이미 몇 년 전에 큰 상실을 경험한 아이였다. 두 번이나 아버지를 잃은 감정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상처 입히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고개를 들었다. 가로등 밑으로 노란 빗물이 어지러이 쏟아졌다. 비가 쏟아지는 폐허 속에서 남자는 권현석에게 권혜연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선 복수자로서의 자신을 버려야 했다. 마지막으로 동생에게 못다 한 말을 꺼내고, 잊어서는 안 될 추억만을 가슴 깊이 묻었다. 그리고 은서를, 줄곧 자신의 복수에 이용했던 그녀를 떠나보내 주었다. 그리하여 지켜 온 회색의 자리였다.
유상일을 부순 자들. 권현석을 죽인 자들. 남자는 조용히 그들의 얼굴을 되새겼다. 날을 찔러 넣은 주머니 한 쪽이 없이 무거웠다. 약속을 위해 그들의 곁에 머물렀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때가 아니라면 소리를 죽이고 가만히 엎드릴 뿐이다. 언젠가 그 기회는 올 것이다. 이번엔 절대로 놓치지 않으리라.
남자는 마음 깊이 다짐했다.
그리고 쏟아지는 빗방울 속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서늘한 빗물이 차갑게 식은 정신을 적셨다. 그는 개의치 않고 골목의 어둠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누구도 아닌 남자는 회색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
가파르게 오르는 언덕 너머로 흰 묘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지런히 안치된 묘비들에 새겨진 이름과 숫자들. 남자의 걸음은 막힘없이 한 곳으로 향했다. 자욱히 깔린 먼지빛 안개가 빗물에 젖은 구두를 스쳤다. 면면의 얼굴을 지나쳐 힘겨이 걸음을 내디뎠다.
자그락, 손에 집히는 한 다발의 꽃을 남자는 막연히 내려다보았다. 아침 일찍 망설이며 거리를 맴돌다 급히 마련한 것이었다. 검은 코트와 어울리지 않는 색색의 꽃들이 물기 젖은 향을 내었다. 새침하게 뻗어낸 꽃가지가 파랬다. 옅은 신음이 잇새로 흘렀다. 아리게 메어 오는 목을 삼켜내고 멈춰 선 걸음을 도로 한 발짝 뻗었다. 어느새 다다른 흰 비석이 그를 맞았다.
조용히 목례를 하고 든 고개에 그의 무덤이 보였다. 비석 뒤 무덤이 잡초 하나 없이 가지런했다. 한구석에 술잔을 기울인 흔적이 눈에 띄었다. 고인 빗물자국 없이 깨끗한 비석. 남자는 올라올 적 즈음 눈에 익은 차량이 주차장을 빠져나간 것을 보았다. 그들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곤란해진다. 뒤를 밟듯 빠져나와 군중 속으로 녹아들었다. 남자는 비석 앞에 꽃다발을 내려두었다. 스쳐지나가는 바람에 얹힌 꽃다발이 부산스레 소리를 내었다. 사그락, 사그락. 거친 바람결에 요란한 소리가 났다. 남자는 침묵 속에서 눈을 감았다. 그에게 다가오는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작은 구둣발이 흙바닥의 잔디를 내디뎠다. 찬 바람에 목도리를 여민 권혜연이 남자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발간 양 볼에 비빈 손을 맞대던 그녀는 남자의 모습에 살풋 멈추어 섰다. 그리고 환하게 미소지었다. 멈춰 선 걸음이 달음박질하듯 빨라졌다.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그녀는 입을 열어 그리운 이름을 불러보았다.
해가 지며 붉게 물드는 회색 안개가, 그들을 짙게 맴돌고 있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