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캐해석입니다. 감상 외의 지적은 받지 않습니다.
- 되도록이면 원본 대사를 옮겨 해석했습니다. 의역 다수 존재.
-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한 외부 자료 인용이 많습니다. 짭 미학론 다수 포함.
* 과거 내용을 중심으로 다뤘기 때문에 근일 이벤트 내용은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 음슴체 주의
와타루의 기본 구성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음. “광대로서 인간의 꿈을 이루는 존재”와 “무대에서 연기자”가 그것임. 이 두 가지 역할이 공존 및 충돌하면서 캐릭터가 성립한다고 생각함.
광대의 역할이란
- 무대와 현실을 통하는 존재, 대개 이름이 불명확하며, 극의 등장과 퇴장이 명확하지 않음
- 인간보다 못하거나 그 이하의, 천한. 인간이 아닌 존재
- 따라서 어떤 말이나 행동도 허풍과 장난이 된다
[silly라는 영단어는 현재 foolish와 같이 어리석다는 의미 (fool은 광대). 단어 원형 seely -> 고대영어로 soelig가 어원이며 행복한, 행운이라는 뜻. 여기서 (신에게) 축복받은, 신앙심이 깊은, 선량한 이라는 의미로 이용/죄 없는 무해한/무력한 애처로운 등. 따라서 어리석은 자는 행복을 건네는 존재.]
<요약: 道化のコンセプトー小野昌/1. foolの語源と意味>
그런 그에게 “어디에도 존재하지 못한, 어울리지 못한 자신이 찾은 이상향”이 무대라고 함. 얼핏 보면 사람들에게 오락거리가 되는 존재로서 무대만큼 어울리는 자리가 없기 때문이라고도 느껴지지만, 저 말을 뒤집어보면 와타루에게 있어서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고 & 또한 어울릴 수 있는 장소가 바로 무대”라고 해석할 수 있음.
어쩌면 무대가 주는 공간에서 자신이 있을 “자리”를 느끼고 안정감을 찾는지도 모름.
와타루의 무대에 대한 열망은 페르소나에 대한 집착으로도 연결됨.
페르소나란 고대 그리스 무대에서 가면을 뜻하는 말임.
가면 모으기가 취미라는 말도, 자기 자신을 가면에 비유했던 것도, 한 인격을 가면에 대입해서 비유한다는 점에서 이 개념에 따라 캐릭터를 구성했다는 걸 알 수 있음.
정리하자면 평생을 광대로서, 즉 어떤 대상에게 필수인 존재가 아닌, 단지 오락거리가 되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존재 (역할) 가 될 수 있는 무대를 놓지 못하는 것이라 볼 수 있음.
그렇다면 왜 주역보다 조연을 자처하는가?
여기서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음. 첫 번째는 와타루 스스로 말한 대로 원해서 주역에서 물러난 경우임. 주역은 이야기의, 세계의 중심임. 각본이 모두 주역을 중심으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에, 무대라는 공간을 느낄 수 있는 여유가 부족함. 따라서 주역과 함께 무대를 느끼고 즐길 수 있는 조연에 더 만족하는 듯 보임. 또한 본래 자신의 본질인 광대로서 주연이 되고 싶어 노력하는 다른 이들의 꿈을 부수고 싶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음. 두 번째로는 와타루의 압도적인 재능을 따라올 자가 적어서 주역 대신 조연을 맡게 되었을 경우임. 무대란 아무리 주역이라 하더라도 여러 요소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하나의 유기체임. 자신은 압도적인 재능 때문에 어딜 서든 걸핏하면 주역이 되어버린다고 말함. 그런 와타루에게 조금이라도 무대에 녹아들어 갈 수 있는 역이 조연이었을 가능성이 있음.
그런 와타루에게 있어 무대가 인생과 떼어놓을 수 없는 공간인 이상, 그는 “자기 자신조차 극 중 하나의 페르소나”로 인식하는 듯 보임.
호쿠토가 “히다카 호쿠토” 역을 연기하는 것을 본 와타루의 반응
「その点は、この日々樹渉と同じ! あぁ、同じだったんですね……北斗くん! だから私はあなたがちょっとだけ鬱陶しくて愛おしかったんですっ、これは目から鱗が落ちるがごとき大発見ですよ!」
“그 점은, 이 히비키 와타루와 같네요! 아, 같았던 거로군요…… 호쿠토 군! 그래서 저는 당신이 조금 성가시지만 사랑스러웠던 거예요, 이건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대발견이로군요!”
<투명과 가면 G in a maze/에필로그 3>
현재의 자신은 무대 위에서 만들어 낸 많은 페르소나 중 하나의 불과함. 그렇기에 무대를 위해서라도 “자신”을 하나의 페르소나에 종속시키지 않으려 하며, 과거의 이야기가 자신을 규정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지도 모르겠음. 예명이라는 이름도, 과거를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도, 날조했다는 것도 이 이유에서지 않을까 싶음.
渉「その男の子は、日々樹渉と名付けられました」
友也 「……はい?」
渉「日々樹渉は、拾われて……。大事に育ててもらった恩を返したいと、いつも思っていました 育ての親に、周りの人々に感謝し、心から愛していました」
와타루 “그 남자애는 히비키 와타루란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토모야 “…….네?”
와타루 “히비키 와타루는, 주워져서……. 소중히 길러진 은혜를 갚고 싶다고, 언제나 생각했습니다. 길러준 부모에게, 주위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괴도VS탐정단 에필로그 2>
반대로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외로움의 근원이 됨. 여러 대사에서 외로움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를 온전히 이해하는 몇 안 되는 오기인 중 하나인 이츠키가 한 대사를 보면 그의 주요 결핍/욕망이 외로움에 기인한다는 걸 알 수 있음.
渉 「普通の人々が暮らす地上から、重力すらも振りきって遠ざかってしまったのです そこはとても寂しい、人肌のぬくもりのない世界でした。英智が、そのまま遠ざかろうとした私の後ろ髪を引いて…… 必死に、この世に繋ぎ止めてくれましたけど」
와타루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지상에서 중력조차 뿌리쳐 멀어지고 만 겁니다. 그곳은 매우 외롭고, 사람의 온기조차 없는 세계였어요. 에이치가 그대로 멀어지려 하는 제 뒷머리를 끌어당겨서…… 필사적으로, 이 세상과 연결해 주었습니다만.”
<괴도 vs 탐정단 에필로그 4>
宗 「ではね、ホッケーマスクくん。……できれば今後も、渉のそばにいてあげてほしい あれは君が思っている以上に、寂しい男なのだよ」
北斗 「………?」
슈 “그럼, 홋케 마스크 군…… 되도록 이후에도, 와타루의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해. 그건 네놈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외로운 남자라는 거다.”
호쿠토 “……?”
<공연회 로미오와 줄리엣/제9화>
와타루가 살아가는 시간 축은 과거와 미래보다는 현재를 중심으로 하지 않을까 싶음. 시간에 종속된 “연극”을 여러 차례 해내면서 순간의 행복, 현재에 믿고 느끼는 것을 중시하게 된 것. 무대는 인간의 꿈을 투영하지만, 무대 위에 선 자는 커튼콜과 동시에 서사가 종결됨. 무대에는 언젠가 끝이 있음. 미래가 있다는 것은 현실에 발붙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허락된 일임.
하지만 그런 와타루에게도 “꿈”이 있음. 꿈이란 대개 미래를 지표로 해서 그려지는 목표임. 현재에 기대어 살아가는 와타루에게도 이뤄내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건 그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만인에게 울려 퍼지는 것 (기쁨이든, 행복이든, 노래든) 이라고 생각함.
와타루 “인간은 이름에 꿈을 가탁합니다—그것이 인간의 창조물인 이상, 이해하기 쉬운 완성도는 안건을 채용하는 이유로 충분합니다.”
(일어판 미체크)
링크에서 와타루는 인간은 이름에 꿈을 가탁한다고 하며, 자신의 이름을 언급함. 반대로 이건 자신이 염원하고 있는 꿈일 가능성이 있음. 하지만 그의 광대라는 역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이 “울려 퍼지는 것”은 그걸 느끼고 받아줄 대상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음. 즉 “상대”가 필요한 것. 말하자면 와타루는 대중, 즉 “인간”과의 연결고리를 갈망하고 있고, 그렇기에 이해받지 못할지언정 끊어낼 수는 없는 존재라는 걸 알 수 있음.
하지만 와타루는 재능에 있어서 인간을 초월한 존재임이 작 내에서 여러 번 언급됨. 그런 와타루에게도 이해자가 있었는데, 그건 유메노사키 혁명을 위해 희생당한 “오기인”이란 존재임.
渉「私にはいますよ、友達。だから私の勝ちだ、なんて言いませんけど あなたが巡り会わせてくれたんです、『五奇人』なんて名付けてね……。感謝しています、心から ありがとう」
와타루 “제겐 있어요, 친구. 그러므로 제가 승리한 것이다, 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만. 당신이 만나게 해 준 거예요, “오기인”이라 이름 붙여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요. 고마워요.”
<엘레멘트 재가 되어 날아가리/제8화>
와타루는 오기인 이라는 존재로 묶이는 바람에 친구가 생겼다고 이야기함. 실제로 이들은 현실에서 동떨어진 사람들의 모임임. 또한 유일하게 말하지 않아도 이해받을 수 있는 대상임. 오기인과 한자리에 있을 때는 익살스러운 태도를 덜 보이고는 함.
와타루 “후후후. 이 멤버가 모이면 다른 분들이 익살을 떨어 주셔서 저는 마음이 편하군요. 일단 홍차와… 나츠메 군이 저희에게 대접하고 싶은 메뉴를 하나씩 내어 주시는 거로 할까요♪”
<스카우트! 익센트릭/제3화>
하지만 그들만의 독자적인 세계에서 갇혀 지내기에는 와타루의 염원이 있음. 이름의 뜻에서 설명했듯이 (또한 여러 언급에서 나왔듯이) 와타루의 꿈은 만인에게 행복을, 기쁨을 전하는 것임. 또한 아무리 추악한 것 (인간)일지라도 사랑하며 (셰익스피어 인용에서 더러운 것은 아름답다는 언급), 만인 군상의 다양한 면면을 보고 소화해내는 것이 삶의 낙임.
어떻게 보면 오기인들 중에서 제일 기인奇人 같으면서도 그 누구보다도 인간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려는 태도를 보인다고 할 수 있음.
가장 이해받지 못하는 “괴물”이 그 누구보다도 “인간”을 사랑해버린다는, 인외의 존재를 다루는 서사에서 흔히 차용되는 구도를 와타루라는 캐릭터도 보이지 않나 생각됨.
여기서 인간에게 더욱 적극적으로 다가가게 되는 계기가 발생하는데, 그건 유메노사키 혁명 시절의 “처형식”임. 와타루에게 있어서 처형식 무대에 악역으로 오르는 선택은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할 수 없다는 신념에 기반한 것과 동시에, 광대로서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마음이 반영된 거라 생각함. 그리고 누구보다도 “무대”에 진심이기 때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극을 망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선택지였음.
어떤 대상에게서든 사랑할 점을 찾아내는 와타루에게도 이번 무대만큼은 지옥 같은 시련으로 표현됨. 여태 와타루 자신은 광대로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존재였음. 그런 자신이 한순간에 불행의, 처단의 대상으로 변모하는 경험을 한 것임.
와타루는 어떤 외부에서의 자극을 온전히 받아낸다기보단, 어떤 무대의 극으로 소화하기 위한 소재로서 삼음.
그렇지만 여태 섰던 무대와는 달랐을 거라 생각함. 무대에서 여러 역을 연기하며 받아왔던 대중의 감정은 어느 정도는 현실과 분리된 것임. 아무리 악역이라 하더라도 현실과 가상을 구분한 후 역에 감정을 투여함. 악역을 맡았다고 해서 뒤에 있는 배우를 비난하지 않음.
하지만 실제로 자신을 향해 던져 오는 악의와 분노를 받아내고 소화하면서 가면 외의, 실제 자기 자신에 가까운 덩어리를 느끼게 된 것 아닐까 싶음. 말하자면 내면적으로 강한 감정의 동요를 느낀 것.
이 시점에서 인간이 아닌 것으로 부유하고 있던 페르소나가, “오기인”화 된 후에 무대에서 처형(붕괴)당함으로서 더는 괴물이 아닌 “인간”이 되는 체험을 한 것일지도 모르겠음. 혁명 시기의 처형식 무대는 현실과 가상의 존재, 대립 구도가 혼재된 공간이라 생각됨. 인간인 자가 괴물이 되고, 악역은 영웅처럼 표현되며 선역은 악마처럼 표현됨.
그런 모순된 공간에서 “오기인으로서의 자신”과 실제로 상처를 입는, “인간 히비키”로서의 페르소나가 분리 및 붕괴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함.
또한 그 체험을 하게 해준 상대에게 흥미를 갖게 된 걸지도 모르겠음. 역설적으로…
이후의 행보에 대해서.
와타루는 츠무기를 “선대(先代)”라 칭하고, 그가 수행했던 광대의 역할을 억지로 빼앗아 왔다고 이야기함. 다른 많은 해석 글에서도 보이듯이 츠무기의 광대 메타포는 광대 중에서도 궁정 광대를 묘사한 듯 보임.
“궁정 광대가 맡은 또 다른 역할로서 희생양scapegoat이 있다. 사시사철 사람들은 자신들을 더럽히고 죄, 불운 등을 불운한 동물, 혹은 인간과 연결 지어 그것을 죽이거나 공동체로부터 추방해왔다. 왕은 자신의 분신으로서 짧은 기간, 죽임당할 수 있는 신분 낮은 자, 가짜 왕(mock king)의 제도를 두고 있었다. 이 가짜 왕으로서 궁정 광대만큼 딱 들어맞는 인물도 없었다. 왕에 대해 매번 조롱을 뒤집어쓰고 불운을 짊어지며 일종의 정신적 분신으로서 그들은 가치를 가졌다고 생각된다.”
<道化のコンセプトー小野昌/3. 道化の起源>
궁정 광대는 왕의 대변자, 또한 오명을 뒤집어쓰는 자. 웃음을 주는 역할, 그리고 유일하게 왕에게 대적할 수 있는 존재임. 트럼프의 조커가 강한 이유 또한 피에로의 원형이라고 불리는 궁정 광대가 왕에게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임. 궁정 광대는 왕과 귀족들에게만 연출하는 기예를 펼쳤기 때문에 비교적 권력자들의 비판과 희화화로부터 자유로웠음.
혁명 이후 케이토가 그린 각본은 종결되었고, 츠무기는 그 역할을 인수한 채 떠남.
인간이 된 체험을 한 와타루임에도 “무대 위에서 연기하듯 인생을 구가하는 것”은 그의 삶의 방식이며, 또한 그와 세상을 연결하는 수단임은 틀림없음. 이 수단을 탈피하지 못하고 택한 것이 에이치의 광대로서의 역할이라고 생각함.
이 또한 작내언급이 없었기에 추측할 수밖에 없지만, 에이치에 대해 “흥미”가 생긴 것만은 사실이라 생각함. 그렇지 않으면 굳이 ‘에이치의’ 광대를 자처할 이유가 없기 때문. 에이치는 자신이 살면서 경험하지 못한 강렬한 감정을 체험하게 해준 대상임과 더불어 (그게 상처라 할지라도), 자신과 친구들이 희생하여 지켜낸 “꿈의 주인”임. 자신이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광대의 역할을 맡음으로써, 동경한다던 자신을 무찌르면서까지 이루고자 하는 꿈이라는 게 무엇인지, 가장 가까이에서 그 결말을 볼 수 있는 자리를 얻은 것임. 또한 자신이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외로움에 스스로 발을 들이는 이유가 궁금했을지도 모르겠음.
또한 에이치는 자신이 “인간”이라고 인식하는 이들 중에서 그를 이해하고 동경하는 존재였음. 무대의 마지막에 세우면 그가 절대 무대를 망치지 않을 것이란 걸 인지하고 있었음. 그리고 와타루는 자신을 동경하는 존재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원하고 있는 듯 보임.
渉「かつての会話を覚えていて、私があなたにそうやって興味を抱くことを…… あなたのお母さまは計算して、三つ編みを結わえてくれたのでしょう」
와타루 “예전의 대화를 기억해서, 제가 당신에게 그렇게 흥미를 가질 것을…. 당신의 어머니는 계산하여 머리를 땋아 주신 거겠지요.”
와타루 “예전에 그분 (호쿠토 어머니)'와 무대 현장에서 함께 일했을 때 이렇게 혼내셨죠. 연기자와 작가는, 따르는 사람이 있어야 한 사람 몫을 해내는 것이라고요.”
호쿠토 “따르는 사람…?”
와타루 “작풍을 흉내 내고, 모방해서 만든 작품, 또는 만드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자주 있는 일이죠. 그렇게 따르는 자가 우후죽순처럼 나타나고, 그것이 생겨야만 연기자는 한 사람 몫을 해내는 것이다……. 그리고, 저에게는 아직 따르는 자가 없기 때문에 반푼이라고 깎아내리셨습니다.”
와타루 “실제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거든요. ‘히비키 와타루처럼 되고 싶습니다!’라고 주장하는 아이는. 즉, 아직도 저는 반푼이라는 겁니다.”
<공연회 로미오와 줄리엣/제11화>
비록 토리가 에이치를 동경해서 몸짓마저 카피하는 식의 동경은 아니었으나, 자신이 동경 받는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면서 어떤 연결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임.
와타루는 새롭게 얻은 페르소나로 현 세계와 발붙이며 살면서, 완전히 이해받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이 와타루라는 존재로서 기능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갔다고 생각함. 처음엔 유닛 활동에 흥미가 없는 것처럼 굴다가, 후에 토리에 대한 태도가 바뀐 것이 (에이치가 토리의 기획서를 거부한 것으로 화낸 건) 이걸 보여준다고 생각함.
이는 “파랑새”, 즉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는 행복”을 찾기 위한 본인의 노력이 뒷받침된 결과임.
渉 「あなたたちが、遠ざかってしまったので…… 私が『人間だ』と認識できる存在が、興味を抱ける愛すべき隣人が、ほとんど誰もいなくなってしまっただけですよ」
와타루 “당신들이 멀어져 버리고 말아서…… 제가 “인간”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흥미를 느끼고 사랑해야만 할 이웃이 거의 아무도 없어져 버리고 만 것뿐입니다.”
渉 「焦って探し回らなくても、幸せのい鳥は意外と身近にいるものです あなたも現 に、己の周りにもっと目を向けなさいね」
와타루 “초조해하며 찾으러 돌아다니지 않아도, 행복의 파랑새는 의외로 가까이에 있답니다. 당신도 현실에, 자신의 주변을 더 둘러보도록 하세요.”
<플라워페스 에필로그1>
허나 츠무기에게서 역할을 넘겨받을 때만 하더라도 이 또한 끝이 있는 각본이고, 엔딩이 존재하리라 생각했음. 와타루가 입버릇처럼 달고 하는 말이 자신은 모방이 특기지만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데는 능력이 없다는 것임. 실제로 어릿광대 역을 넘겨받은 것도 자신의 온전한 발상이 아닌, 츠무기에게서 “억지로 빼앗은 것”이라 인식하고 있었음. 어떠한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겪어왔던 수많은 극과 같이 결말이 있을 것이라고.
渉「あなたに、ひとときの幸せな夢を見せてあげたかった それが『先代さん』から、道化の地位を無理やり奪うようにして得た私の役目だと けれど。所詮は、代役でしたね。彼ほど上手に演じられませんでした」
와타루 “당신에게, 한때의 행복한 꿈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것이 “선대 씨”로부터 광대의 지위를 무리하게 빼앗은 제 역할이라고. 하지만. 결국, 대역이었죠. 그와 같이 훌륭하게 연기할 수 없었어요. 아니, 그가 너무나 훌륭한 광대를 연기했으니 저도 같을 거라 생각했어요. 마지막의 마지막에, 헤어진다고.”
<Link Deadend/제7화>
宗 「ふん。どんな物語の主人公にでもなれるくせに、相 わらず他人の書いた脚本どおりにしか踊れないのかね」
슈 “흥.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도 될 수 있는 주제에, 여전히 다른 사람이 적은 각본대로 밖에 춤추지 못하는 건가.”
<플라워페스 에필로그2>
그리고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얻게 되는 변화가, 에이치가 찾지 못했던 “진짜” 파랑새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한 부분임.
渉 「英智、私は『本物』になりたい、あなたがかつて得られなかったい鳥に、本物よりも本物らしいからこその、至上の演者です」
와타루 “에이치, 저는 “진짜”가 되고 싶어요. 당신이 과거 얻지 못한 파랑새가, 진짜보다도 더 진짜 같은 것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연기자이죠.”
페르소나는 ‘사회에 맞춰가는 것’이며 “한 사람이 여러 개를 지닐 수 있고, 충돌하기도 하며, 시간이 지나면 변화”하기도 함. 이는 각각 와타루의 삶의 방식, 오기인 이후의 행보, 지금의 와타루를 대변함.
그는 여태 짜인 각본 내에서만 연기를 펼쳤던, 어디까지나 복제품인 페르소나로 만족하는 것이 아닌, 오리지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스스로” 하게 된 것임.
모방에서 최상의 것을 추구했던 와타루는 기존에 남의 것을 빌려 써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페르소나를 변형하고, 스스로 생각해내기에 이른 것임. 이를 통해 무대를 떠나면 사라질 한시적인 연극이 아닌, 에이치가 보고 있는 “현실의 꿈”의 일부가 됨으로써 더는 이해받지 못하는 인외의 존재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지상에 발을 붙이게 되었다고 생각함. 현재의 시간축에 기대어 살던 와타루가 스스로 “되고 싶은 것”, 즉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꿈”을 가지게 되며 현재 이후의 삶을 바라보게 된 것이라 생각함.
(+)
예술과 모방, 원본의 복제품 하면 미메시스의 개념이 먼저 떠오르는데 (…) “모방은 잘 하지만 창조성은 없다”라고 본인을 평가하던 와타루가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한 부분에서, 미메시스 개념 변천이 떠올라 첨부합니다 (^^…
“뛰어난 미메시는 일종의 감쪽같은 사기 행각이다…. 이를 아주 못마땅하게 보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플라톤이다. 그에게는 그림 속 포도는 물론이고, 화가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쟁반 위의 포도조차 ‘진짜 포도’가 아니다. 현실 속의 포도, 그것은 이상적인 진짜 포도를 흉내 내고 있는, ‘포도’라고 불리는 어떤 것일 뿐이다.”
“우리가 예술을 통해 느끼는 기쁨은 일반적으로 모방의 대상 그 자체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다. 대신에 모방된 대상체의 결과물 혹은 재현 된 완결품에서 감상의 즐거움을 얻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기쁨과 즐거움의 감정은 대상이 보여주는 고유성의 모습을 보거나 대상의 보편성을 느끼는 과정을 통해서도 전이된다는 점이다. 심지어 모방된 결과물이 본래의 대상체와 형상적으로 똑같지 않을지라도 ‘가치 의 유사성을 감지할 수만 있다면 감상의 쾌가 작동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Aristotle 1449b 25-32).”
“미메시스는 일종의 선별과 선택의 작업이다. 예술적인 미메시스란, 차이와 거리의 필터를 이용해 무언가를 걸러내 버리고 특정한 무언가를 뽑아내 화폭 위에 응집시키는 정제와 정화의 작업이다. 그럼 도대체 무엇을 취사선택하는 것일까? 화가는 대상으로부터 ‘그것을 그것이게 만드는 것’, 즉 대상의 본질을 뽑아내 화폭에 끌어온다. 이 때 미메시스는 모방이나 이미테이션의 의미를 넘어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 플라톤과는 달리 미메시스의 가치를 높이 샀다. 미메시스를 한다는 것, 그리고 미메시스 된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고, 미메시스를 통해 학습을 시작한다는 사실에서 동물과 구분된다고 생각했다. 미메시스는 인간이 세상을 배워나가는 인간 고유의 학습법인 것이다.”
<연극의 은유적 표현과 시각화에 관한 연구 & 미메시스, 그것은 단순한 모방인가? 예술의 본질인가?: http://gokmu.mediaon.co.kr/news/pdf_down.php?no=1169&page_no=6&type=ezview>
에이치가 역을 빼앗으면서까지 잡아 낸 존재라면, 어떻게든 멀어지려는 와타루를 끝까지 쫓아간 존재가 있는데, 그건 그가 부장으로 있었던 연극부의 일원들임. 초반에 와타루의 재능을 보고 들어갔던 부원들도, 연극이 하고싶어 들어갔던 이들도 모두 와타루의 기행에 혀를 내두름. 심지어 학생회에 그의 기행을 고발(…)하기에 이르고, 유메노사키 혁명과 겹치면서 활동비를 삭감당하기까지에 이름.
그럼에도 와타루의 곁에 남아있었던 부원은 “평범함에서 벗어나고 싶어” 연극부를 택한 토모야와 그의 기행에는 학을 떼지만 와타루의 “재능”만을 보고 입부한 호쿠토임. 토모야의 훈련을 위한 것이라며 동물원 우리에 던져넣고 (…) 쓰러지기 직전까지 혹사시키며, 호쿠토와 토모야 모두 “배우로서의 재능이 없다”며 일갈함. 하지만 한편으로는 「부장」으로서의 면모도 보이는데, 호쿠토의 “홋케 마스크”에 대한 뒷이야기와 토모야의 “결의”를 이끌어 낸 방식에서 이런 면이 가장 두드러짐.
北斗「……悔しかったよ、部長 その怒りが、後の俺たちの革命へと繋がっている。俺の最初の動機はそれだった、子供っぽい私怨だ 革命だの何だのという崇高なお題目は、後からついてきた あんたが革命の種を蒔いたんだ」
호쿠토 “분했다고, 부장. 그 분노가 나중에 우리들의 혁명으로 이어진 거야. 내 첫 동기는 그거였어. 철부지없는 개인적인 원한이지만. 혁명이란 무엇인가, 라는 그럴듯한 숭고함은 나중에서야 따라온 거지. 당신이 혁명의 씨앗을 뿌린 거야.”
渉「けれど。憐れなピエロが、それでも満足して笑えるということを……あなたに伝えたかった 私のおまけとして、そんな地獄の一端を垣間見せることで いずれ、あなたが同じような苦難に陥ったときに、動揺しないで済むようにとね」
와타루 “하지만. 가련한 삐에로가, 그럼에도 만족하여 웃을 수 있다는 것을… 당신에게 전해주고 싶었어요. 제 덤으로서, 그런 지옥의 일부를 살짝 보여주는 것으로. 언젠가, 당신이 같은 곤란에 빠졌을 때 동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SS 노력/제16화>
비록 방식은 험할지라도 ‘히다카 세이야의 아들’로서 세간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질타에도 취약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처한, 호쿠토를 향한 나름의 배려였던 것임. 또한 와타루가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라 하더라도 호쿠토가 홋케 마스크로서 그날의 무대에 선 것으로 인해 오기인으로 내몰렸던 그때의 설욕을 (간접적으로) 하게 됨. 그 당시에는 최악의 최후였을지도 모르는 선택이, 후에 적어도 해피엔딩이라 부를 수 있는 결말에 다다른 것임.
友也「部長、泣いてるんですか……?」
渉「おや? 笑い話をしているのに、泣く理由があります? おかしなことを言いますね、友也くん!」
友也「その話、本当なんですか?」
渉「どうでしょう? 私の舌が紡ぐのは、歌と馬鹿げたホラ話だけですけど?」
토모야 “부장, 우는 거예요……?”
와타루 “어라? 웃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울 이유가 있나요? 이상한 말을 하는군요, 토모야 군!”
토모야 “그 이야기, 진짜예요?”
와타루 “어떨까요? 제 혀가 자아내는 건 노래와 바보같은 허풍일 뿐입니다만?”
<괴도 VS 탐정단 에필로그2>
토모야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로 풀어내며 와타루는 눈물을 흘림. 이것이 “진짜” 눈물인지 토모야는 알 수 없었지만, 기대에 차지 못해 반쯤 포기하고 있던 토모야를 동요시키는 동기가 됨.
友也「(でも俺は……。俺はほんとに本気だったんですよ、日々樹部長 あんたを独りにはしない、したくない! いつか追いついて髪の毛の先っぽを掴んでやるっ、そう思ったんだよ! 放っておけなかったから!)」
토모야 (하지만 나는……. 나는 정말로 진심이었어요, 히비키 부장. 당신을 혼자 두지 않겠다고, 두고 싶지 않다고! 언젠가 뒤쫓아가서 머리카락 끝을 잡아내겠어, 그렇게 생각했다고! 내버려 둘 수 없었으니까!)
<투명과 가면 G in a maze/제 8화>
결과적으로는 그의 눈물이 진심이었든 아니었든, 토모야는 그 계기를 통해서 부장을 홀로 둘 수 없다는 “결의”를 하게 되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계기가 되었음. 그것이 ‘’실제 세계에서 진실이든 거짓이든,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으면 진실이 된다’를 몸소 느끼고 성장하게 된 것임.
友也「だから髪を長く伸ばして待ってろ、日々樹渉!」
渉「呼び捨てですか。まぁ、私は部長じゃなくなったので構いませんけど。私、演じる役柄によっては普通に散髪しちゃいますよ~♪ それでも髪の毛の先っぽに手が届くように、努力しなさい」
토모야 “그러니까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기다리라고, 히비키 와타루!”
와타루 “경칭 생략인가요. 뭐, 저도 부장이 아니게 되었으니 상관없지만요. 저, 연기하는 역할에 따라서는 여간해선 머릴 잘라버릴 거라고요~♪ 그래도 머리카락 끝에 손이 닿을 정도로, 노력하세요.”
<투명과 가면 G in a maze/에필로그8>
渉「(けれど、あなたたちはいつの間にか、それこそ第四の壁を突破して私のもとへ来てくれたんですね 単なる近ごろ流行の観客弄りではなく、私を共演者にしてくれました)」
와타루 (하지만, 당신들은 어느 순간, 이것이야말로 제 4의 벽을 돌파하여 제 곁에 와준 것이로군요. 단지 짧은 유행의 관객놀이가 아닌, 제 공연자로서 와주었습니다.)
<투명과 가면 G in a maze/에필로그3>
와타루는 그들과 보낸 연극부를 추억하면서, 이런식으로 누군가와 함께 보낸 것은 처음이라는 말을 함.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기쁨을 선사하던 “어릿광대 히비키 와타루”역에서 벗어나 “연극부장 히비키 와타루”를 연기하면서, 아무리 몰이해한 자신일지라도 끝까지 따라와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마음을 열게 된 것임. “연극부”라는 존재를 통해 여러 일들을 겪으며, 그의 부원들 뿐만 아니라 와타루 자신도 성장할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함.
비록 여러 일들이 있었지만 그가 원하던, 아름다운 나날들. 아픔도 있지만 그걸 기반으로 성장하고, 부딪혀 넘어질 때도 있지만 다시 일어나 뛸 수 있는, 아름다운 “청춘”을.
渉「(いつの間にか口癖になっていましたよね、『Amazing』が…… 本当にこの一年間、まったく退屈することもなく新たな知見や刺激が得られまくりでしたから 充実していました。いいえ、青春をしていましたね この私が!)」
와타루 (언젠가부터 말버릇이 되고 말았네요. 『Amazing』이……. 정말로 이 일년간, 전혀 지루해질 틈 없이 새로운 식견과 자극을 받아왔으니까요. 알차게 보내왔네요. 아뇨, 청춘을 보낸 거예요, 제가!)
<투명과 가면 G in a maze/제9화>